▲ 경상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외국어를 전공하는 대학생들도 요즘은 종이 사전(辭典)을 들고 다니지 않는다. 인터넷 사전 덕분이다. 스마트폰만 켜면 언제 어디서나 알고 싶은 단어의 뜻을 쉽게 찾아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종이 사전의 존재가치는 결코 낮게 평가될 수 없는 소중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물론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 속에서 종이사전의 생명력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사전은 국력을 평가해 주는 '바로미터'와 같은 존재다. 저력을 가진 나라에선 분야별로 별의별 사전들이 다 구비되어 있고, 특정 나라의 말을 배우는데 필요한 그 나라 외국어 사전들도 한 두 종이 아니다. 반면, 못 사는 나라 사정은 크게 다르다. 오늘과 같은 글로벌 시대에 영어나 일본어·중국어를 좀 쉽게 배워보려고 해도, 자기나라말로 설명이 되어 있는 변변찮은 외국어 사전 하나 없기 때문이다. 있다 해도 포켓사전 정도라 하니 말이다.

나는 90년대 중반에 중국에서 유학을 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각국에서 중국어를 배우러 온 유학생들이 많았다. 그런데 두터운 중국어 사전을 들고 다니는 외국학생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못 사는 나라 유학생들은 자기 나라말로 만들어진 중국어 사전이 없다고 했다. 이때 깨달았다. 사전 한 권에도 국력이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한 권의 사전은 그냥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단한 사명감과 끈기가 요구되는 결과물이다. 한 사람의 힘으로도 되지 않는다. 수많은 전문가들의 피눈물나는 노력이 수반되고, 연구·집필·제작에 필요한 자본이 따라 주어야 한다. 그러니 평범한 한 권의 사전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는 인적·지적·물적 자본이 총망라되어 있어 국력의 상징으로 가늠하기에 충분하다.

나도 한때 중국어 사전 편찬에 참여한 일이 있다. 출발부터 완성까지 전 과정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해를 넘겨가면서까지 전업(專業) 신분으로 집필 작업에 동참했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그 지난한 작업 속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느꼈고 큰 경험을 했다. 지금도 그 사전을 보면 함께했던 분들의 노고가 떠오르고, 특히나 편찬 책임자였던 교수님의 그 고민에 찬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가 편찬한 '중한사전'의 후기를 읽다 보면 눈물겨워 책장을 넘기기가 어렵다. 한 권의 사전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그 여정은 한 개인이나 조직의 집념을 뛰어넘어 국가와 국력 이상의 뭔가를 생각하게 해 준다. 1971년 구상으로부터 1989년 출판에 이르기까지 거의 20년 동안 연인원 27만 명이 동원됐다는 말은 차치하고라도, 그 곡절 많았던 시련을 극복한 후에 탄생된 이 한 권의 종이사전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지곤 한다.

'우리말 사전' 편찬에도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다. 1910년대 한글 사용이 금지된 일제강점기에 국어학자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이 최초로 편찬한 우리말 사전에 대한 이야기다. 사전 하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국의 우리말을 모으는 그 가슴 찡한 감동 스토리가 영화로도 만들어졌으니 '말모이'다. 이 영화는 '사전과 국력'이라는 상관관계를 돌아보게 하는데 큰 감명을 주기도 하지만, 나에겐 또 개인적인 스토리가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말모이'에는 변사 장면이 나온다. 나도 한때 '검사와 여선생'이란 무성영화로 변사 순회공연을 한 적이 있고, 초청을 받아 서울에 가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어느날, '말모이' 영화 제작사에서 연락이 왔다. 판수역의 유해진, 정환역의 윤계상, 봉두역의 박지환 세 분에게 변사교육을 좀 부탁한다는. 세상에…. 아마추어가 프로에게 교육을 하다니…. 이건 아니다 싶어 사양했지만, 여러 측면에서 영화 '말모이'는 내게 특별한 의미와 감동을 안겨준 영화였다. 최초의 우리말 사전 '말모이'가 정식으로 출판은 되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 정신은 영원무궁할 것이다. 우리나라 우리 국민의 자부심, '한글'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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