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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덕의 고금담리(古今談理) (77) : 일상의 행복
기사입력: 2018/12/11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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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꽃보다 할배 리턴즈', 언젠가 TV에서 인기를 끌었던 프로그램이다. 황혼의 배낭여행을 컨셉으로 한 버라이어티 프로다. 이순재·신구·박근형·백일섭·김용건 다섯이 주인공이다. 늘 남의 인생만을 연기해 오던 연예계의 굵직한 다섯 '할배'들이 자기 이름과 목소리를 가지고 함께 외국 나들이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언젠가 백일섭의 모습에 주목이 됐다. 그는 수술한 다리 때문에 평소에 일행들보다 뒤처져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남들보다 30분 일찍 출발해서 목적지에 먼저 가 있겠다고 나섰다. 다른 사람들은 5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30분이나 일찍 나선 것이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백일섭의 따뜻한 인간성이 그대로 전해졌다.


 좀 느리기는 했지만 혼자서 뚜벅뚜벅 잘 걸어가는 백일섭의 뒤를 카메라가 따라갔다. 예상외로 잘 걷는다는 생각에 스탭 누군가가 말을 건넸다. "잘 걸으시네요." 이 말에 짤막한 그의 대답, "나도 내 속도로는 잘 걸어." 순간, '내 속도'라는 말이 턱 걸리면서, 짐꾼 이서진이 '자유로운 영혼', '까다롭지 않은 백일섭'이라고 말한 표현에 여러 생각들이 겹쳐졌다.


 백일섭의 말에 울림이 있었다. 우리의 삶도 자기 처지에 맞는 자신의 속도로, 초조함이나 조급증 없이 인생을 여유롭게 걸어갈 수만 있다면, 백일섭의 평범한 이 대답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여유롭고 행복해야 할 여행에서 어쩌면 지금까지 그는 다리 건강한 일행과 보조를 맞추려고 '따라가는 일'에 늘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안타깝게 포기한 것도 많았을 것이다. 우리네 인생 이야기처럼.


 30분의 여유를 가지고 출발한 백일섭, 얼마나 좋았을까? 카메라는 그와 동행하면서 백일섭의 시선에서 여러 풍경들을 비춰주었다. 평소처럼 뒤처져 걸었다면 보지 못하고 놓쳤을…. 사소하지만 여행의 기쁨이 되기에 충분한 독일 베를린의 아름다운 장면들을….


 어린 꼬마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장면에, 한가롭게 걷는 시민들의 모습. 분수대 옆에서 서로 껴안고 있는 다정한 연인의 뒷모습도 보이고, 느긋하게 앉아서 뭔가를 떠먹고 있는 여인의 모습도 보였다. 노트북을 내려다보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 개를 몰고 길을 가는 그저 평범하기 그지없는 어느 행인의 모습도 보였다. 특별난 장면 하나 없는데 뭔가 '낯설게', 그리고 무지 행복해 보였다. 이국 거리의 요모조모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따뜻해지기에 충분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벽의 뭔가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는 백일섭의 뒤태는 30분의 여유로운 출발이 아니었더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평범한 일상에서 얻을 수 있는 '비범'한 행복이란 게 바로 저런 것인가? 여행에서 조금만 일찍 서둘러 길을 나서고,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지금의 내 주위를 살펴본다면, 이 세상엔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이 참으로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도 좋지만 구태여 외국이 아닌 내 주위에서도 일상을 '낯설게' 해석하고 감상할 수 있는 여유만 있다면 행복의 편린들이 적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란 프로그램이 그 가능성을 확인해 준다. 지금까지 내가 다니던 '그저 그랬던' 골목도, 내가 먹던 '별것 아닌' 음식에도 외국인의 시선으로 낯설게 따라가다 보니, 더 이상 평범하지 않은 의미와 감동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아, 일상의 행복이란 바로 이런 거로구나."


 베란다 구석의 말라버린 국화 화분이 오늘따라 다시 보인다. 마른 꽃대는 잘라 버리고 뿌리 담긴 화분은 방으로 옮겨놓고 가끔 물을 줘야겠다. 내년에 보게 될 노란 국화꽃을 기대하면서…. 갑자기 가슴이 따뜻해 온다. 뭔가 행복하단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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