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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대학 출신 시골뜨기, 국립대학교수의 꿈 이루다
기사입력: 2022/07/28 [18:51]
이명석 기자 이명석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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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신영 교수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추신영 교수…시골뜨기 교수 도전 성공
하동에서 초·중·고 졸업, 경상국립대 진학…법학·석·박사 취득
‘지방대학 출신’ 조건 극복 위해 독일 뮌헨대 유학…성공으로 이끈 길
유리벽 뚫고 대학교수 자리…5∼600명 회원 이끄는 학회장 맡아
경남도 로스쿨 유치가 꿈…꿈 위해 끊임 없는 노력 계속 이어가

 

 대학교수가 되는 길은 길고도 험난하다. 더구나 지방대 출신은 타 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뒤 모교에 되돌아 오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학교수의 자리를 얻는게 거의 불가능하다.

 

경남 하동에서 초·중·고를 졸업하고 신설대학인 경상국립대학교 법과대학에서 학·석·박사 학위를 받고 독일 유학을 거쳐 전주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민법 교수가 된 사례가 ‘꿈을 향한 집념은 유리벽도 뚫을 수 있다’는 희망의 매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해외 유학 뒷바라지까지 해내신 부모님의 집념 또한 좋은 사례로 읽혀진다. 그렇게 자랑스런 일은 아니라 할지라도 일반 상식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장벽을 집념과 노력으로 극복한 사례 여서 대담기획으로 취재 정리한다. <편집자 주>

 

■저는 (추신영 교수) 경남 하동군 금남면에서 농부의 아들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부터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고, 이름도 ‘믿음의 꽃(信英)’이 되라는 뜻으로 교회 목사님께서 지어주셨다.

 

■아버지는 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이다. 할아버지를 일찍 여의시고 아래로 4명의 고모와 삼촌들을 시집장가 보내시고, 저희 5남매를 키우면서 인생을 다 바친 분이다. 늘 일하고 부지런하게 뭔가를 도모하는 열정이 넘친 분이다. 객지에서 생활을 하다가 주말에 한 번씩 집에 오면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누곤 했다. 참 유익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교회에서는 장로로서 모범을 보이셨고, 사회에서는 하동군 발전협의회 회장을 하시는 등 지역발전을 위해서도 열심히 사셨던 분이시다.


어머니는 전형적인 내조형 여성으로 말수가 극히 적으신 분이다. 격조 있고 기품이 있는 어머니다. 항상 소녀적 감성을 품고 살아가는 분이다. 그래서 우리 엄마는 다른 엄마들 하고는 다르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 왔다.

 

▲ 동료 교수와 함께 단체사진   


■급속한 산업화 발전시기를 같이한 세대로서 학창시절을 되돌아보면 특별히 여느 학생들이 느낀 감정과 다를 것이 없다. 초등학교 입학하기도 전에 집에 키우던 소를 먹이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소 몰고 뒷산으로 갔던 기억, 초등학교 3학년 때 전기가 처음으로 들어와 신기해 하면서 백열등 전구를 보고 밤새 잠을 자지 않았던 기억, 20리 길 되는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자취를 시작하면서 석유곤로에 처음 끓여본 미역국, 중학교 때 책읽기를 좋아해서 문예반에 가입했는데 유일한 남학생인 나를 쳐다보던 여학생들의 어색한 눈빛, 고등학교 시절 갑자기 시작된 교복자율화 조치로 어떤 옷을 입고 학교에 가야 할 지를 고민했던 기억, 고 3때 교회 성탄준비를 하면서 품었던 한 소녀에 대한 순수한 첫사랑, 공부는 좀 했지만 막연하게 무엇이 돼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는 못했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한 평범한 소년이었다.

 

■대학생활은 제게 큰 전환점을 심어준 시기였다. 시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상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해 민법 수업을 듣고 법학의 묘미에 빠지게 됐다. 강단에서 강의하시는 교수님이 멋있어 보였고, 전달이 시원찮은 교수님을 보면서 나라면 저렇게 가르치지 않을 텐데 라고 생각하면서 근거 없는 호기를 부려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대학교수의 꿈을 꾸게 됐고, 그때부터 친구들은 저에게 추박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듯 진짜 별명대로 박사가 됐다. 저는 일찍부터 결이 다른 선택을 했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경상대 법대 나와서 교수되는 건 하늘의 별따기 보다 어렵다”, “너도 현실적인 길을 택해 고시공부를 해 보라” 하지만 그때마다 제게 힘과 용기를 주신 교수님이 계셨다.

 

■저는 대학원 1학년 때 아내와 선을 보아 결혼을 했다. 결혼 전 아내는 제게 장래에 대해 질문을 했고, 저는 그때 마다 당당하게 “저는 교수가 꼭 될 것입니다”라는 대답을 했다. 지금 와서 아내의 말을 빌리면, 뭘 믿고 저렇게 당당하게 말할까라고 생각 된다. 그러면서 저 정도면 뭐를 해도 처자식 굶기지는 않겠다는 판단을 했다고 했다. 사실 아내는 제가 교수가 되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 그렇게 당당하게 대답하는 저를 보면서 교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반신반의를 했다고 솔직하게 말해 줬다.

 

■학부시절부터 대학교수의 꿈을 꾸니 지도교수이신 강대성 교수님께서 독일 유학을 권유해 주셨다. 대학원 다닐 때부터 꾸준하게 독일어 공부를 했으며, 독일로 어학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제가 마침 독일로 첫 어학연수를 떠난 곳이 독일 남부 로텐부르크였는데, 그 곳에서 현재 조선대 법대교수로 있는 한지영 교수를 처음 만났다.

 

그 당시 한 교수님도 법학공부를 시작하기 위해 어학연수를 밟는 학생이었고, 뮌헨대 입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저도 기왕이면 우수한 교수들이 많이 있는 뮌헨대에서 공부를 해 보기로 마음을 정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박사과정을 마친 후에는 독일 뮌헨대에 재직하고 계시는 P. Schlosser 교수님이나 B. Rimmelspacher 교수님의 지도를 받고 싶어서 편지를 보냈다. 얼마 되지 않아 두 분 교수님께서는 흔케히 지도를 해 주시겠다는 답장을 주셨고, 그 길로 독일 유학을 떠나게 됐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점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부모님께서는 한 푼이라도 아껴 가며 제게 피 같은 유학비용을 보내 주신 점이다. 저의 집이 넉넉한 편이 아니었고, 시골에서 특별한 벌이도 없으신 부모님의 돈을 받는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뮌헨대학교 유학생 동료들과 기념사진   

 

■독일유학을 마친 후, 모교인 경상대학교로 돌아와 시간강사를 하게 됐다. 불운하게도 저는 학내의 갈등이 최고조로 다다른 시기일 때 교수 임용기를 맞고 있었다. 논문 많이 쓰고 열심히 공부만 하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대학교수가 되는 길은 그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교수님들의 갈등의 불씨가 제게도 미칠 줄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교수공채공고에 맞춰 원서를 내면 심사의 기회도 부여하지 않고 민법 전공불합치라는 이유로 떨어뜨려 버렸다. 아이러니 하게도 세명대에 임용될 때도 민법교수로, 전북대에 임용될 때도 민법교수로 임용됐다. 말하자면 미리 심사대상에서 제외해버린 것이었다. 모교에서의 상처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저를 뽑는 과정에서의 인사파동 여파는 컸다. 경상대 법대가 로스쿨을 유치하지 못한 시발점이 됐고, 결과적으로는 인구 350만 명의 광역지자체인 경남이 로스쿨이 없는 유일한 곳으로 전락하는 원인이 됐다. 비근한 예로 인구 180만명 밖에 되지 않는 전라북도에는 전북대와 원광대 2곳에 로스쿨이 설치돼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경남도는 사실상 변호사를 배출하지 못하는 법조불임 광역단체이고 무변촌인 셈입니다.

 

■저는 세명대 민법교수 채용공고가 난 것을 우연히 보게 됐고, 운 좋게도 그 학교에 임용되는 행운을 얻게 됐다. 그렇게 고대하던 대학교수의 길이 2005년부터 시작됐다. 세명대 임용 후에도 열심히 논문을 쓰고 학생을 가르치면서 생활하던 중, 2007년 11월 말, 수업을 마치고 나왔는데 번호도 모르는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이 와 있었다. 그 중에서 제일 먼저 온 전화로 전화를 거니 “네 안녕하세요. 저는 전북대 총장입니다.

 

혹시 저희 학교에 오실 수 있으신지요?”라는 물음 이었다. 그러고는 당장 오늘 오후에 면접을 보자는 이야기였다. 당시 각 학교마다 로스쿨 출범으로 교수모시기가 혈안이 되어 있을 때였는데, 시대를 잘 타고난 행운이 저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길로 저는 며칠 사이에 세명대 교수에서 전북대 교수로, 사립대 교수에서 국립대 교수로 신분이 바뀌게 됐다.

 

▲ 스승의날 학생들과 함께   

 

■2022년, 어언 대학교수로 활동한 지가 벌써 17년이 됐다. 좋은 학생을 만났고, 좋은 동료교수를 만났다. 저는 복이 많아 어디를 가든 사람을 잘 만났다. 제가 가진 능력에 비해 좋은 기회도 많이 얻고 있다.


대학교수로 일하면서 보람된 일을 꼽으라면 로스쿨 출범 시 법무부 주도의 변호사 시험문제를 개발하는 테스크 포스팀에 참여해 로스쿨제도의 정착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그 작업은 2년 가까이 진행됐다. 매주 서울출장이 피곤하기도 했지만 대한민국의 인재를 양성하는 기본틀을 다시 짠다는 자부심으로 열심히 일했다.


올해는 한국을 대표하는 큰 학회의 학회장도 맡게 됐다. 이 학회는 500∼600명의 법학교수와 변호사, 판사 등이 가입돼 있는 학술단체로서 선거를 통해 회장을 선출하고 있다. 하동 시골 촌에서 태어나서 엄청나게 출세한 셈이다. 이 모든 것이 제가 혼자 잘나서 된 것이 아니고, 부모님, 아내와 가족들, 교수님들, 학생들이 모두 도와서 된 일이다. 저보다 더 똑똑하고 유능한 분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과분한 직책을 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도 그 부족함을 잘 알기에 강의 들어가기 전에도 남들보다 한자라도 더 보고 들어가고자 하며, 논문을 쓰는 경우에도 남들보다 한번 이라도 더 검토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저는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교수생활을 하고 있다. 제가 고향을 위해 일하고 싶은 꼭 한가지 일이 있다. 경남에 로스쿨을 유치해 전국에서 유일하게 법조인을 배출하지 못하는 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일이다. 어떻게 보면 그 일은 제게 숙명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로스쿨이 출범한지 14년이 됐지만 어느 도지사나 국회의원도 큰 관심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마치 의과대학이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교육부나 법무부의 관련자들을 만나 당위성을 설명하고, 대한변호사협회나 법학교수회, 법학전문대학원협의회 등 유관기관을 설득시켜서 경남도의 로스쿨설치의 필요성을 주장하려고 한다.


한편, 대학교수를 마치고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지를 묻자, “‘모범적이며 정직하며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대담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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