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 작가 (경남문인협회·경남시조시인협회 회원)
 


해마다 시월이 오면 마음의 색이 먼저 물들고 있음을 인지한다. 한 해의 열정이 노을처럼 차오르고 익을 만큼 익은 세월이 빛을 내는 계절. 언제나처럼 들녘은 황금빛 일색이고, 바람은 한결 단아해진다. 계절이 주는 고요한 울림은 늘 내 안의 이야기를 깨워놓는다.

차오르는 열정을 모두 쏟아낸 노을이 노랗게 물든 들녘에 도둑고양이처럼 내려앉아 단잠에 들었다. 시월의 풍경엔 눈에 거슬릴 이유를 단 한 가지도 찾아볼 수가 없다. 사방천지가 눈부심과 설렘으로 녹아 있어, 멋모르고 찾아온 강쇠바람도 숨을 죽이며 지나간다.

 

       산책 / 박정은 

 

   달을 머리에 이고 걸었다

   시월 밤바람이 등을 민다

   등을 어루만지는 손길

   당신이었네

 

'산책'이라는 짧은 시는 필자의 글 중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이다. 카페를 마감하고, 걸어서 귀가하던 어느 시월 밤. 길모퉁이 작은 사찰에서 들려오던 풍경 소리에 발길이 멈췄다.

풍경 옆에서 나를 바라보는 달빛은 지친 내 어깨를 감쌌고, 바람은 어머니의 손길처럼 등을 쓸어줬다. 그 순간의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 핸드폰 메모장에 시를 써 내려갔고, 그 시가 새한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나를 작가의 길로 이끌었다.

쉰이라는 나이에 처음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어린 시절 자연이 내게 가르쳐준 감성 덕분이었다. 눈으로 듣고 귀로 본다는 것, 그것을 알게 해준 건 고향의 밤하늘이었다. 별빛이 쏟아지고, 구름 뒤에 숨은 달빛을 찾아 피어오르던 반딧불이가 하늘을 수놓던 시월의 빛과 바람, 그리고 들려오는 수많은 소리들이 내겐 글의 스승이었다.

가을걷이가 한창인 산골의 시월은 일년 중 가장 빨리 하루가 시작된다. 해가 게으름을 피우는 아침이면 굴뚝마다 피어오르는 구수한 연기와 바삐 움직이는 경운기 소리가 아침을 깨운다. 이슬 머금은 벼이삭이 햇살을 받아 윤슬처럼 반짝였고, 농부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은 그 어떤 보석보다도 빛났다.

빨간 고추잠자리들이 허공에 선을 그리며 날아오르면,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그리운 그곳을 그려본다. 동네 어귀 첫 번째 집이 우리 집이었다. 바로 앞에는 대청마루가 넓은 정자가 있었고, 주변을 감싸던 포구나무들은 두 팔로 안아도 닿지 않을 만큼 크고 굵었다. 시월이면 포구나무에 달린 열매가 불그스름하게 익는데 맛이 달짝지근해서 따먹기도 하고, 언니 오빠들은 그 열매로 새총을 쏘며 놀기도 했다.

정자 아래 널찍한 바위는 우리의 놀이터였다. 하루가 저물면 별빛이 내려앉던 곳, 지금은 부모님이 계시던 그 집도 정자도 포구나무도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 시절의 온기를 느낀다.

등을 스치는 바람은 따스하고, 달빛은 여전히 내 어깨를 감싸 안는 시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마음이 닿는 곳엔 언제나 고향이 있고, 글이 있고, 사랑이 머무르고 있다.

이맘때면 오래전 내 안에 머물던 그리움이 스민다. 그때의 공기, 그때의 냄새, 그때의 웃음이 지금의 나를 부드럽게 감싼다. 젊은 날의 서툰 설렘과 상처조차도, 되돌아보면 맑은 물결처럼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이었다.

그렇게 지나온 시간들은 나를 단단하게 길러냈고, 지금의 내가 흔들림 없이 맑고 당당한 작가로 글을 쓰며 살아갈 수 있는 원천이 됐음을 이제야 알게 된다. 오늘의 고요는 어쩌면 그 기억들이 만든 평화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을 하며 찬란한 시월의 기억이 작가로 인도한 그날을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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