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부자

툇마루를 스치는 바람이 한결 시원하다. 예전과 다름없이 명절을 가만히 물리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루에 걸터앉는다. 저만치 기상 좋은 소나무가 “애썼다”며 푸르른 기운을 전해주는 듯하다. 한바탕 소란 뒤에 허전함이 밀려들 즈음, ‘의령 부자 축제’에 가자는 소식이 들려왔다. ‘부자’라는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 기꺼이 마음을 열었다.

의령 리치리치 축제는 “의령에서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유쾌한 인사 속에는 조금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간절한 바람이 숨어 있으리라. 의령은 예로부터 ‘부자의 고장’으로 불려 왔다. 남강의 푸른 물결 위에 솥처럼 생긴 바위, 바로 그 솥바위가 부자의 상징이다. 전설에 따르면 솥바위 반경 20리 안에서 부귀(富貴)가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삼성, LG, 효성의 창업자 등. 한국의 산업화를 이끈 인물들이 모두 이 지역 출신이라는 사실이 전설에 힘을 더한다. 그래서일까. 평소엔 한적한 의령이 축제 때면 사람들의 발길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올해로 네 번째를 맞는 ‘리치리치 축제’는 해마다 한 계단씩 성장해 왔다. 본 행사장의 규모와 정돈된 주변, 그리고 부스마다 다채로운 체험과 먹거리가 어우러져 완성도를 더한다. 이 축제를 통해 지역민들의 살림살이도 조금 더 단단해지리라. 나는 여러 부스를 둘러보다, 조금 떨어진 꽃 축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꽃밭은 그야말로 꽃들의 향연이었다. 넓게 펼쳐진 코스모스가 바람결에 흔들리니,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들판을 노랗게 물들인 금계국과 감미롭게 속삭이는 핑크뮬리가 마음을 설레게 한다. 소녀 시절, 신작로를 따라 피어 있던 코스모스길을 걷던 기억이 문득 떠올라 타임머신을 탄 듯 가슴은 나이를 잊는다. 수많은 꽃이 어우러진 꽃밭 한가운데서, 나는 어느새 마음속까지 꽃물이 들어 ‘꽃 부자’가 되었다.

정암루 아래, 강물에 발 담근 솥바위는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키며 흐르는 시간을 묵묵히 견뎌왔다. 강 위에 길을 낸 부교는 흔들림 없이 탄탄하고 안정적이다. 바위 위에 우뚝 선 소나무 한 그루가 제법 품새를 갖추고 있다. 솥바위를 한 바퀴 도니, 곳곳에 놓여 있는 동전과 지폐가 눈길을 끈다. 여차하면 물속으로 굴러떨어질 저곳에 동전을 던지며 각자의 소망을 걸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사랑의 지속을, 누군가는 가정의 평화를, 또 누군가는 사업의 번창이나 어려움의 해법을 빌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솥바위는 수많은 바람을 품어주는 작은 기도처가 되어 있다.

돈이란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누구나 올려다보는 대상이지만, ‘부자’의 뜻은 결코 금전적 가치에만 있지 않다. 진정한 부자는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등잔불의 심지가 다른 등잔에 불을 옮겨줘도 자신의 빛이 줄지 않듯이, 나눔과 사랑은 베풀수록 커진다. 서로를 향한 따뜻한 시선, 배려와 사랑을 나눌 때 행복은 어김없이 따라온다. 가족이 평화롭고, 이웃이 다정하면 세상은 한층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그것은 돈의 움직임이 아니라, 마음의 움직임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음 부자’가 된다.

리치리치 축제는 단순한 지역 행사가 아니다. 인간이 본래 간직한 아름다운 마음을 다시 꺼내어 비춰보게 하는 나눔의 장이다. 가만히 솥바위를 바라본다. 수많은 세월 동안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묵묵히 품어온 바위다. 햇살 아래 강물은 은물결로 반짝이고, 솥바위는 윤슬에 싸여 오늘도 사람들의 소망을 품는다. 진짜 부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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