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쯤 전, 어느날 왼쪽 눈에 갑자기 큰 거미가 한 마리 나타나더니 시선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큰 병인가 싶어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비문(飛紋)’이라 했다. 노화 현상으로 눈 속 유리체 혼탁물이 망막에 그림자를 드리워서 생기게 된 것이라 했다. 특별히 치료할 방법은 없고, 시간이 지나다 보면 좀 작아 질 수는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냥 함께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지금은 많이 작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실체’를 지닌 채 내 안에 있다.
비문이 생긴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왼쪽 귀에서는 매미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지금도 나를 괴롭히고 있는 이명의 시작이었다. 때로는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처럼, 또 때로는 세찬 바람 소리로 들리더니, 이제는 청력에까지 영향을 주어 생활이 상당히 불편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 또한 퇴행성이라 근본적인 치료 방법은 없다고 했다. 이 모든 것이 피할 수 없는 세월의 무늬들이 아닐까 싶다. 방법이 없다. 그저 수용할 수밖에.
그런데 참으로 묘한 일은, 비문과 이명을 의식하면 거미가 보이고 매미소리가 들리지만, 바쁜 일상에 휩쓸리거나, 어떤 일에 몰입해 있을 때는 그 존재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깨닫게 된다. 고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얼마나 의식하느냐에 따라 존재감이 달라진다는 것을. 눈의 거미도 귀의 매미도 그대로인데 마음이 바쁘면 그들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그러니 비문과 이명은 내게 세월이 남긴 흔적이자, 몰입의 본질을 일깨워주는 조용한 스승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불편함이라는 것도 처음엔 낯설고 거슬리지만, 오래 함께하다 보면 그조차 내 일상의 일부가 된다. 견디는 법을 배우는 동안 불편은 조금씩 둥글어지고, 고통은 그 속에서 다른 의미를 만들어낸다. 조개가 모래알의 상처를 감싸 안고 진주를 빚어내듯, 인간도 아픔을 품고 견디는 과정 속에서 한 겹 한 겹 더 단단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비문과 이명은 이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겐 조족지혈에 불과할 것이다. 아니, 이런 정도를 가지고 불편하다고 한다면, 헬렌 켈러나 베토벤은 내게 뭐라고 말을 할까 싶다. 헬렌 켈러는 어린 시절부터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어 세상과 단절된 어둠과 침묵 속에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거의 살아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베토벤은 30대 초반부터 청력을 잃기 시작해 말년에는 거의 완전히 들을 수가 없어 사람들과의 대화조차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그런 ‘불행’ 앞에서도 고통을 삶의 기본값으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더 찬란한 삶을 빚어냈다. 결국 고통의 크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헬렌 켈러와 베토벤은 고통을 지워버리려 하지 않고, 그 속에서 자신의 빛을 길어 올렸다. 그들이 그랬듯 나도 내 안의 비문과 이명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세월이 내게 남겨준 이 작은 불편들은, 어쩌면 내 삶의 무늬이자 나만의 리듬일 것이다. 눈 속의 거미와 귀속의 매미가 오늘도 조용히 존재를 알린다. 나는 그들의 울음과 그림자 속에서, 조금씩 진주처럼 단단해지고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요즘은 캘리그라피 작업을 즐기며 지낸다. 주로 내가 겪은 경험이나 삶 속의 이치를 담아 어록처럼 남기고 있다. 엊그제는 생활의 불편함과 연결시켜 이런 작품을 하나 만들었다. “불편도 오래 견디면 편안해지고, 고통도 잘 참으면 진주가 된다.(不便久安, 忍苦化珠.)” 이 말은 나를 다독이기 위한 글이지만, 비슷한 처지에 놓인 누군가에게는 공감과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겨 있다. 우리 모두 오늘의 불편함을 잘 견뎌, 내일의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어낼 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꼭 그렇게 되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