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의 실질 구매력, 그러니까 같은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의 양이 점점 줄고 있다. 만화 검정고무신 속 기영이와 기철이가 받던 용돈 10원에서, 내 어린 시절 하루 용돈 500원을 지나 이제 막대 아이스크림 하나가 1000원이 넘는 시대가 되었다. 물가가 오르는 건 단순히 돈의 숫자가 커졌다는 뜻이 아니다.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 조금씩 비싸지고 돈의 무게가 가벼워졌다는 의미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이 정도면 싸다’, ‘이건 너무 비싸다’ 같은 예전 기준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심리적 가격 기준’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과거의 가격에 익숙해져 있고 그것을 현실의 잣대로 삼는다.
그 기준의 가장 낮은 선은 100원이다. 우리는 100원을 ‘쓸 수 있는 최소한의 돈’으로 받아들이고 그 아래 단위는 이미 화폐라고 느끼지 않는다. 다시 말해, 100원은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최소 화폐단위이자, 사회적 합의의 하한선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그 100원을 실제로 보기란 쉽지 않다. 현금 대신 카드와 휴대폰으로 결제하는 시대가 되면서, 100원은 이름만 남은 돈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 100원이 하동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다. 하동군은 단돈 100원으로 군내 어디든 갈 수 있는 ‘100원 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교통비를 낮춘 게 전부가 아니다.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모두에게 똑같이 주었다는 점에서 이 제도의 의미는 크다. 교통이 불편했던 농촌 마을 사람들에게 100원은 그저 요금이 아니라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입장권이 되었다.
이 버스가 다니기 전에도 버스비가 부담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1500원, 2000원이라는 숫자는 ‘갈까 말까’를 고민하게 만들지만 100원은 망설임을 없앤다. 금액이 낮아진 만큼 마음의 거리도 짧아졌다. 덕분에 사람들의 이동이 늘고 시장이 다시 돌고 있다. 사람이 움직이니 돈도 돌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행정이 이 제도를 운영하기 위해 쓴 예산이 100원일 리는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군민의 100원이 지역경제를 다시 살리고 있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걸 ‘승수효과’라고 한다. 한 사람의 지출이 다른 사람의 소득이 되고 그 소득이 또 다른 소비로 이어지는 선순환이다.
하동군의 이런 구조를 경제학에서는 ‘내생적 성장’이라고 부른다. 보통 지방경제는 외부 관광객, 대도시 자본, 국가 예산 같은 ‘외부의 돈’에 의존한다. 그러나 하동의 100원 버스는 돈이 바깥에서 들어오지 않아도 지역 안에서 계속 순환하도록 만들었다. 군민이 움직이며 소비하고 그 소비가 지역의 가게와 시장으로 흘러가고, 다시 그 소득이 또 다른 소비로 이어진다. 즉, 성장의 원천이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 하동의 버스는 하나의 교통정책이 아니라 작은 지역이 스스로 순환 경제를 만들어내는 실험이다.
이제 청암면 묵계마을의 할머니도 금남면 노량항까지 가서 제철 참숭어 한 접시를 드시고 올 수 있다. 왕복 200원.
‘놀기삼아 가면 되니까.’
교통비 부담이 사라지자 외출은 여가가 되고 여가는 소비를 낳았다. 작은 이동 하나가 시장의 온도를 올리고 시장은 다시 마을을 데운다. 장날에는 버스를 타고 읍내에 나와 반찬거리를 사고, 병원에 들르고, 시장 한 바퀴를 돈다.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지역경제의 혈류를 돌게 한다.
물론 아직은 배차 간격이 길다. 하지만 외지인들이 조금만 더 찾아오면 자연스럽게 노선도 늘어날 것이다. 수요가 생기면 공급이 따라온다. 시장의 기본 원리가 시골 마을에서도 똑같이 작동한다. 그렇게 하동의 도로 위에는 오늘도 100원이 굴러가고 있다.
이같이 100원은 단순한 요금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돈이자 경제가 아직 인간적인 온도를 지닌다는 증거다. 100원이 지금의 하동을 움직이고, 사람을 움직이고,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아마도 이 작고 둥근 동전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따뜻하게 쓰이는 화폐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