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한 잔의 술을 사랑하는 ‘여행하는 술샘’과 함께 떠나는 서른 세번째 여행이다. 내일이면 시드니에 도착한다. 2주간의 일정 중 먼저 국제 컨벤션에 참석해야 하지만, 마음은 벌써 다음 주로 예정된 헌터밸리 Hunter Valley로 달려가 있다. 18년 만에 다시 찾는다. 시드니에서 북쪽으로 차로 2시간이면 닿는다.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산지이기도 하다.
18년 전 가을, 나는 임신 5개월의 몸으로 그곳을 찾았다. 남편과 시드니에 사는 친구 가족과 함께였다. 우리는 와이너리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며칠 묵으며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임신 중이라 와인을 삼킬 수는 없었지만, 입에 머금었다가 뱉어내는 시음만큼은 가능했다. 그 짧은 순간만으로도 충분했다. 호주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익은 포도의 진한 과일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목으로 넘기지 않아도 헌터밸리 와인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헌터밸리는 호주 와인의 출발점이다. 19세기 초 유럽인들이 호주에 정착하면서 양조용 포도를 처음 심은 곳이다. 2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 땅은 호주 와인 산업과 함께 성장해왔다. 현재 150개가 넘는 와이너리와 4,400헥타르가 넘는 포도밭이 브로큰백 Brokenback 산맥의 구불구불한 능선을 따라 펼쳐져 있다. 호주 하면 남호주의 바로사 밸리나 서호주의 마가렛 리버가 먼저 떠오른다. 생산량으로는 남호주가 가장 많다. 헌터밸리는 시드니에서 가장 가까운 와이너리로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와인 산지이다.
헌터밸리는 세미용, 샤르도네, 쉬라즈로 특히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세미용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영할 때는 가볍고 상큼하지만, 숙성되면서 복합적이고 깊은 풍미로 변해간다. 18년 전 내가 맛봤던 세미용이 지금쯤 어떤 맛으로 익어있을지 궁금하다. 사람도, 와인도, 시간 속에서 변해간다.
당시 방문했던 와이너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티렐스 Tyrrell's였다. 1858년부터 가족 경영을 이어온 역사 깊은 곳으로, 헌터밸리를 대표하는 와이너리다. 셀러 도어에 들어섰을 때 느껴졌던 나무 향과 와인 향이 아직도 생생하다. 브로큰우드 Brokenwood와 맥기건 McGuigan도 들렀었다. 각 와이너리마다 개성이 뚜렷했다. 어떤 곳은 전통을 고수하며 클래식한 스타일을 유지했고, 어떤 곳은 젊은 와인 메이커들이 혁신적인 시도를 하고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지난번 가보지 못했던 와이너리들도 방문할 예정이다. 마간 와이너리가 특히 기대된다. 지속 가능한 농법으로 가꾼 단일 포도밭 와인으로 유명한 이곳은 2021년 올해의 와인메이커 상을 받기도 했다. 50년 이상 된 올드 바인으로 만든 샤르도네는 풍부하면서도 부드러운 질감을 자랑한다고 한다. 화산 토양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와인의 맛이 얼마나 깊을지, 18년 전에는 뱉어내야 했던 그 맛을 이제는 온전히 삼키며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헌터밸리의 매력은 와인만이 아니다. 와이너리마다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는 현지 식재료로 만든 요리를 맛볼 수 있다. 패독 투 플레이트 Paddock to Plate, 즉 농장에서 식탁까지의 개념을 실천하는 곳들이 많다. 포도밭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서 현지 치즈와 빵, 숯불에 구운 양고기를 곁들인 샤르도네 한 잔. 상상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18년 전, 나는 배 속의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와인을 뱉어냈다. 이번 여행에서는 온전히 와인을 즐길 수 있다. 입에만 머금고 뱉는 것이 아니라,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그 여운까지 느낄 수 있다. 헌터밸리의 비옥한 토양에서 재배된 포도로 만든 쉬라즈의 블랙베리와 후추 향, 세미용의 감귤류 상큼함과 미네랄 느낌, 샤르도네의 부드러운 질감까지. 18년을 기다린 그 맛들이 다음 주면 내 앞에 펼쳐질 것이다.
3일간의 헌터밸리 여행이 끝나고 돌아오면, 아마도 트렁크는 와인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리고 그 와인을 마실 때마다, 나는 다시 헌터밸리의 포도밭을 떠올릴 것이다. 18년 전의 아쉬움과 다음 주의 설렘, 그 모든 시간이 한 잔의 와인 속에 녹아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