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 작가 (경남문인협회·경남시조시인협회 회원)
결혼 시즌, 눈부시게 빛나는 계절이라서 일 거다. 계절에 걸맞은 아름다운 결혼식이 많은 요즘, 맘껏 축하를 전할 수 있는 것도 이미 지난겨울 큰딸을 결혼시켜 본 경험이 있어서다.
큰딸 지연이는 새로운 삶의 문턱을 넘었다.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또 누군가의 며느리가 된다는 사실이 막연했던 세월이 어느덧 현실이 됐다.
결혼 날짜를 정하고 준비를 서두르던 날들 속에서, 나는 문득 딸의 첫 울음을 떠올렸다. 3.2킬로그램의 작은 몸짓, 세상을 다 담은 듯한 커다란 눈. 그 눈빛 하나가 내게는 기쁨이자 자랑이었고 또 한 줄기 희망이었다.
아이의 걸음마를 지켜보고, 첫 글자를 배우던 순간을 지나,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의 문을 함께 건너던 그 긴 시간이 단숨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대학에 합격했다고 안긴 날의 따뜻한 체온, 직장에 첫 출근하던 날 설레어하던 그 미소. 그 모든 시간이 내 삶의 가장 소중한 순간이었고, 부모라는 이름을 조금씩 배워가는 기쁨이었다.
딸이 성인이 되고, 같은 여성, 같은 사회인이 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지연이는 더 깊은 존재로 다가왔다. 친구 같기도 하고, 때로는 삶의 지혜를 나누는 도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배운 적 없는 부모의 역할 속에서 시행착오도 많았건만, 지연이는 언제나 밝고 반듯하게 자랐다. 그래서였을까. 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던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설명하기 힘든 뭉클함에 잠겨 있었다.
결혼 준비를 하던 어느 겨울밤, 나는 홀로 거리를 걷다 흔들리는 가로등 불빛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바람이 흔들어 놓은 것은 불빛만이 아니었다. 딸을 시집보내야 한다는 마음의 떨림, 어쩐지 감당하기 버거운 빈자리 같은 것. 불빛은 흔들리고, 내 마음도 흔들리고, 그 겨울밤은 그렇게 조용히 세월 속으로 숨어들었다.
나는 지연이에게 자주 말했다. “삶은 늘 지쳤다가 다시 웃고, 아팠다가 또 피어나는 거야.” 세상의 틈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넓어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다들 빠듯하게 버티고 살아간다는 뜻도 전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되뇌며 위로받고 싶은 사람은 나였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알겠다. 꽃이 핀다고 해서 저절로 피는 꽃은 없다는 사실을. 그 뒤에는 긴 침묵의 계절, 인연들의 손길, 보이지 않는 수고가 쌓여 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도 그러하다는 것을, 지연이와 사위 석철이의 인연이 그러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두 사람이 마음을 다해 쌓아온 시간 위에 또 하나의 가족이 생겨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가장 아름다운 인연의 꽃이 피었다는 결과다.
결혼을 앞두고 나는 어떤 조건도 따지지 않았던 것 같다. 석철이가 지연이를 사랑하는지, 단지 그것만 물었다. 깊이 고개를 끄덕이던 그 순간, 나는 마음으로 이미 답을 얻었다. 나이도, 직업도, 가진 것도 묻지 않았다. 사랑이란 서로의 온도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지가 전부라 여겼기 때문이다. 수많은 인연이 모여 한 생을 이루듯, 두 사람의 결혼 역시 머나먼 시간의 바람결 속에서 천천히 이어져 온 연이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돌이켜보면 결혼이란 특별한 듯 특별하지 않은 일이다. 다만 소소한 날들이 조금 더 소중해지고, 일상의 온도가 조금 더 따뜻해지는 것. 그 평범한 순간들이 쌓여 특별해지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야 비로소 딸을 놓아주는 마음을 배운다. 어머니의 소임이란 결국 제 아이가 스스로의 길을 걷도록 조용히 등을 떠미는 일이라는 것을, 그 길에서 너른 마음으로 바라봐 주는 일이라는 것을.
지연아, 살아가다 보면 크고 작은 파도가 늘 밀려오겠지만, 봄이 겨울을 이겨내듯 너도 그 시간을 차분히 건너가길 바란다. 서두르지 말고, 흔들려도 괜찮으니, 네가 선택한 사람과 네가 만든 가정이라는 작은 우주 안에서 행복이라는 빛을 오래오래 키워가길 바란다.
엄마는 그저 멀리서 묵묵히 기도하마. 모든 인연이 너를 빛으로 이끌기를. 그리고 그 빛 속에서 너의 삶이 고요하고 단단히 피어나기를.
